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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읍성 "오기재 사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남포읍성 "오기재 사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 양창용
  • 승인 2023.11.19 16:52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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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수 보령경찰서 주포파출소
강양수 보령경찰서 주포파출소
강양수 보령경찰서 주포파출소

 ■ (남포읍성 藍浦邑城)
- 문화재청 주관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소재한 남포읍성의 복원 작업이 수년간 소걸음처럼 더디게 진행 되고 있으나,남포읍성에 대한 역사 학자들의 정확한 연구 발표가 없거나 보령시의 홍보부족 또는 사실과 다른 왜곡된 안내 자료 표지판 등 남포오석, 남포벼루등이 세계 최고의 품질로 소개되고 있는 반면 정작 남포면과 인접한 웅천읍에서 출토 제작 되거나,남포면 읍내리의 경우 면소재지로 읍 승격 사실이 없음에도 읍내리 지명을 사용중에 있어 역사적 사실과 그 이유를 보령시에서 시민,또는 남포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수수방관 하고 있는 실정.

보령시민 만 36년째 초로의 노년이 다가오거나 인생 후반전 2막 시작점을 앞두고 무한불성의 전반전과 같은 열정 만큼은 아니더라도 36년의 노가다와 같은 공직 생활중 몸에 베인 습성과 정신으로 근 한달간 역사 공부에 매진 하다보니 생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혼자만 알고 묻어버리기엔 너무도 값진 역사적 사실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대왕이 관광 보령을 추구하는 보령시에 베픈 은혜를 저버리는 것 같거나 백성을 너무도 사랑한 세종대왕의 마음이 보령시에 있었음에도 철저히 무시 당하고 있어, 보령시민이나 역사에 조그만 관심 있는 모든 분들께 알리고자 합니다.

 보령시청 싸이트와 남포읍성 입구 시설된 게시판에는 문화재청,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 역사와 달리

지정별 :지방기념물 10호
지정년월일: 1973.12.24.
위치: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
소유:보령시
규모:900m(86,528평방미터)
시대:고려,조선시대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끝자락 평지에 쌓은 성으로(웅천) 고려시대에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고 우왕때 석성으로 축조하여 공양왕 2년 완성하고 군영을 설치 하였다.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 성터)

조선 태조 6년 병마첨절제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였고. 서해로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고 민심을 바로 잡았다.
길이 900m,높이 3.5m의 수직성벽에 미석과 여장을 두었고 사방에 치를 두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동서남 삼대성문을 두고 옹성형태로 만들어 외부에서 성문을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내에는 우물이 3곳 있었고(웅천)
서쪽 성벽에 수구가 남아 있으며 당시 건물로 동헌 옥산아문 진서루가 보존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고남포현과 현 성터 기록을 짜깁기 형식으로 알리고 있는 바,

보령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천시내를 깃점으로 북쪽은 행정구역상 보령현, 남쪽은 남포현으로 나누어 2명의 현감이 목민관 지역관리자로서, 관할지역내에서는 행정과 사법, 입법 권한 등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포현 남포읍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세종 26년(1444년)까지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에 위치 하였다.

- 남포현 지명 유래에 대해 지리지에서는 ‘남포현은 본래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인데, 신라에서 남포현으로 고쳐졌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남포현은 삼국시대부터 세종 초기까지 현 관아 남쪽 15리 지점에 고현(고남포)의 터가 있다.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 고려말 1380년(우왕6년)부터 1388년(우왕14년)까지 일본 해적들이(왜구)서해바다와 연결된 웅천천을 따라 침략하여 현을 함락 하는 등 노략질과 양민을 학살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고려 말에 연해안 지역은 빈번한 왜구의 노략질로 피해를 많이 입어서 ‘연해안 수십 리의 지역에는 인가가 전혀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황폐화 되었다.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고려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고려 쇠퇴의 일부 요인이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려조〈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에 비로소 성을 쌓고(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살게 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서 왜구들의 노략질을 피해 삶의 터전을 더욱 외진 곳으로 옮겨야만 했고, 삶은 곤궁해져야 했던 당시 백성들의 곤궁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남포현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홍산(鴻山)현에 34리, 서쪽으로 서해바다 죽도(竹島) 10리, 남쪽으로 비인(庇仁)현 27리, 북쪽으로 보령(保寧)현에 9리,서울 447리(5일 소요)

호수는 1백 80호, 인구가 9백 49명이어서 보령현 보다는 규모가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상시 수비하는 병력인 진군이 17명에, 왜구를 감시하기 위한 수군역할을 했던 선군이 61명이었다.

남포현의 관내에서 생산됐던 생산물로는 어류 등 수산물과 함께 진상하는 토산품으로 은어가 언급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 4대 왕으로 한글 훈민정음 창제 반포(1446년) 2년전인 세종 26년(1444년)

왜구들의 잦은 침략과 웅천천 홍수 범람 피해에 따라 옥마산 줄기를 배경으로 너른 들판 평지에 읍성을 쌓아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바다 감시의 방어 기능도 수행할수 있도록,
현소재지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번지"에 남포읍성 축조 시작 세종 28년 완공(문화재청 기록)

● 문종1년(1451년) 현 남포읍성 완성 기록
2,476척, 높이 12척, 성안 우물 2개소
☞남포읍성안에는
동헌ᆞ내야ᆞ객사ᆞ책실ᆞ공수청ᆞ장청ᆞ환청ᆞ군기고ᆞ사령청ᆞ작청ᆞ토사ᆞ향청ᆞ객사삼문ᆞ동헌 외삼문등이 있었다고 기록되나 현재는 동헌만 남아 있고 건물정면에는
"옥산아문(玉山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옥산(玉山)지명은 산세가 옥처럼 생겼던 것에서 유래
(옥마산,눈이 쌓인산)아문(관아) 마을.

남포현의 수령인 현감은 조선시대 문관에 속한 종육품, 외관직으로 목사.군수에 이어 지방수령으로는 가장 낮은 관직.남포현과 보령현은 왜구의 피해가 컸던 고을 해안 요충지에 있어 현감 임명시 병조와 협의 무관 임명,동문,서문,남문등 3개소 출입문

○ 남포현감(종 6품)등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릴 목민관 발령시 왕에게 하직 인사시 암기 해야할 임무: 수령 칠사
(지방관에 대한 인사고과의 기준)
1)농상을 성하게함
2)호구를 늘림
3)학교를 일으킴
4)군정을 닦음
5)역의 부과를 균등하게함
6)소송을 간명하게함
7)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

●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1445년) 10월 2일
"사간원에서 흉년이니 남포 등지의 성 쌓는 일을 정지 하소서" 라는 청에 왕이 답하기를

"한가한 때를 당하여 성을 쌓지 않고 있다가 뜻밖에 변이 생긴다면 미칠수 있겠는가"

"대신이 폐할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정지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쌓기를 권하는 사람도 어찌 흉년인지를 살피지 못하고 억지로 쌓자는 것 이겠는가
참으로 부득이 한 것이다"

 -세종 28년 4월 30일
왕이 의정부에 글을 내려서 "지난 가을에 충청도의 성 쌓는 일을 파하자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내가 따르지는 않았으나 마음이 또한 편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는 고려와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했던 철령 북쪽의 고려 땅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는데,당시 무관으론선 최고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최영장군은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명이 차지하고 있는 요동 지역도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고 말하며 오히려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4대불가론을 말하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지만 최영의 명에 따라 이성계는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던중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자칭 역성혁명(군부반란)으로 정권을 잡아 고려 왕조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음에도,주체성 없이 세력이 큰 명나라에 붙어 그 존립을 유지코자 했던 사대주의에 빠진 신하들과 성공한 반란은 처벌치 못한단 단어 원조격인 조부,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귀족 세력을 경계하고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추숭했던 불교를 억압 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통치 사상속에서, 우리나라 역사중 유일무이 하게 백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 세종대왕이 병세가 깊었던 45세부터 신하들의 반대속에 2년간 마음 상해 가며 축성하여 52세 승하후 문종 즉위 1년째 완공 기록된 남포읍성의 현재 모습은, 잡초, 잡목이 우거진 채 방치되어 초등학교 건물과 민가 두채, 마을 쓰레기 집하장으로 사용되어 악취와 파리떼가 점령한 상태로 성곽밖 읍내리 마을회관 뒤편 공터로 이전함이 절실하며, 읍성입구 게시판의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에 있었던 고남포현 읍성기록과 현 남포읍성에 대한 오기재 기록을 바로잡아 보령시민, 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의 혼란을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고, 관광보령을 추구하는 보령시에서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 같은 대규모 투자가 어렵다면 세종대왕의 유지 천만분의 일이라도 받들어 문화재청 협의 승낙이 필요한 성곽내 개발은 뒤로 미루더라도, 성곽 밖 논밭을 매입하여 둘레길을 조성하며, 둘레길 가로수로 속성수종이며 5월초 개화하는 왕벚나무, 나라꽃으로 100일간 무궁무진 개화하는 무궁화를 식재 하고 중간중간에 세종대왕 동상 또는 조형물과 관련 컨셉 브랜드를 개발 시설 하면, 보령시에 새로운 읍성 관광지가 탄생 될 것을 무시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편 문화재청 싸이트상의 남포읍성 소개란에 고남포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오기재된 보령시 알림 싸이트와 게시판을 수십년간 방치한 것이 국가공무원으로서 지방공무원을 무시하거나, 전문가 집단인 자신들만의 지식으로 남길 바랄 생각으로 치부한 것이라면 세금을 납부중인 10만 보령시민과 전국민들을 기만, 바보 취급한 것이며, 남포읍성에 대한 소유자,관리단체를 보령시로 기재해 놓고도 보령시의 개발을 문화재 훼손등 말도되지 않는 이유로 방해 한다면 그동안 문화재 관리,조사차 남포읍성에 대한 방문을 수백차례 진행시 오기재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방치한 것에 대한 직무유기,방임에 대한 형사 책임 여부를 따져 봐야 할 것입니다.

 

보령읍성 근처에 각종 생활쓰레기 투기로 몸살

 

남포 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이미지 차원에서 바른 대책 요구

 

남포 읍성 입구에
각종생활쓰레기 악취로 민원발생 관광보령에 치명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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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 2023-12-02 15:06:31
왜이렇게 황씨를 욕하는지??
돈 먹은 사람이 황씨라 그런가요
역사왜곡이 황씨라 그런가요
도대체가 보령시장신문의 댓글은 보령문화원 하고
온통 황씨들 비방글이니
교정비 사과 안했나요??

보령인 2023-11-23 08:41:29
우리 보령에 정말 좋은 기사네요

창동리주민 2023-11-23 07:06:33
그동안 알지 못한 사실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광산김씨 2023-11-22 09:05:48
역시 보령시장신문 좋은 기사입니다
문화원 돈ㆍ돈
실체가 이제 들어나네요.
그동안 연구한답시고 돈ㆍ돈
강의한다고 돈ㆍ돈
교정비 돈ㆍ돈
문화재는 개판
참 나쁜 인간들
문화원 폐쇄
문화원 폐쇄 하라!!

옥마산 2023-11-21 16:54:34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