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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보령사랑 애향(愛鄕)의 본산(本山)
(특집2)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보령사랑 애향(愛鄕)의 본산(本山)
  • 임인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23.08.28 08:28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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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적 마중물로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살아 있는 지방사(地方史)

 

1991년 대한민국의 지방자치제 이후, 전국의 지자체들은 지역의 뿌리찾기 운동과 이를 통하여 지역의 정체성 정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지역민들이 자기지역의 역사와 문화등 동일성(同一性, identity, 아이덴티티)으로 다른 사물과 대립구분되면서 변함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개개의 성질을 끊임 없이 요구하며 우리 보령시도 지방 역사로 이어가고 있다.

보령시장신문 에서는 지난번 “(특집)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만세보령(萬世保寧) 탄생의 주인공”이란 제하의 기사를 보고 많은 시민과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특집2)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보령사랑 애향(愛鄕)의 본산(本山)”이란 제호로 보령역사의 선구자적 마중물로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살아 있는 지방사(地方史)의 한 축인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출현(出現)과정과 애향정신(愛鄕精神)의 보령사랑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보령시의 근 현대사 지방 역사는 1971년 이돈구(李敦求) 보령군지편찬위원회 위원장(보령군수)가 발행한 “보령군지(保寧郡誌)”가 있으며 서(序)문에 따르면 “산자수려(山紫水麗)하고 어염자수(魚鹽紫水)가 고루갖추어 져서 예로부터 인심(人心)이 순후(醇厚)하여 문자(文字) 그대로 평안(平安)함을 보전(保全)하는 ”만세의 보령(萬世의 保寧)” 이루고 있는 우리고장은 오서(烏棲)” ~ 중략 ~에 공식 기록 하고 있으며

만세보령(萬世保寧)의 다른 역사 기록은『향토연구』제9집(충남향토연구회,1991)에 기록에 따르면 조선후기부터 100여년 1900년대 충청도 지방에 유행던 호서가(湖西歌)란 노래의 가사 속의 만세보령(萬世保寧)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구성 및 형식을 보면 필사본인 이 작품은 대전(大田)의 송승호(宋承鎬)가에 가전(家傳)되고 있는 『가정요람(家庭要覽)』의 권말(卷末)에 부록되어 있다. 호서지방의 지명을 열거하여 노래한 것으로, 형식은 4음보 1행 기준으로 42행이다.

내용은 “목천(木川)나무 ᄇᆡ을무어 면쳔(沔川)슈의 ᄯᅴ워놋코 당진(唐津)으로 흘너져어 호셔을 도라보니 골륜산 중조봉은 ᄇᆡᆨ두산이 연산(連山)이요 황하슈 나린물이 황간(黃澗)슈 되단말가 물마다 ᄒᆡ미(海美)요 뫼마다 셔산(瑞山)이라”와 같이 대체로 한 구에 하나의 지명을 안배하여 읊어나갔으며, “ᄐᆡ안(泰安)셰게 일이읍시 사슈구경 다니노라 청풍(淸風)군 네아니면 한가한 이ᄂᆡ몸이 누구와 만세보령(保寧)할고”라고 끝맺고 있다.

이런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역사를 도참설(圖讖說)로 전해오는 오서산 자락에서 듣고 자란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초대 2장을 역임한 신홍식(申弘湜) 회장이 그 애향(愛鄕)의 주인공이며 만세보령의 선구자적 마중물로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살아 있는 지방사(地方史)로 명실공히 주인공 되는 시대의 흐름이다.

 신홍식(申弘湜 1930~1999) 회장이 나고자란 청라지방에는 예부터 많은 양반(兩班)들이 낙향(落鄕) 사족(士族)이 많은 것이 특징(特徵)의 하나이다. 청라(靑羅)를 가리켜 삼다향(三多鄕)이라고 부르는데 兩班(양반)(班多(반다)), 돌(石多(석다)), 말이 많은 것(言多(언다)) 때문이라고 한다. 반다(班多)는 많은 人士(인사)가 배출되었고, 돌이 많은 것은 有名(유명)한 烏石(오석)이 이곳 인근에서 나오고 있음을 뜻하고, 언다(言多)는 지조가 굳은 선비들이 살았기 때문에 바른말(直言(직언))과 상소를 많이했기 때문이다.

신(申) 회장은 오성지간만대영화지지(烏聖之問萬代榮華之地)의 오서산 자락 청라면 장현리에서 태어 나며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 장군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平山申氏) 가문의 보령에 정착한 한성윤공파 신정의 후손들로 400여년전 오서산 서쪽 오포리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사간공파 후손들로 18세기 중후반경 오삼전면(吾三田面) 현 청라면 황룡리 부근에 정착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신경섭가옥 집안들이고 입향조는 신위의 아들 신광태(1756-1788)이며 공이 신홍식 회장의 청라 입향조 이시다.

일찍 1965년 대천읍에 월산탄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광산 사업가로 시작하여 이후 1974년 신홍식 회장이 경영하는 월산탄광은 날로 수익을 내고 보령의 중견 사업가로 광산업의 성공을 기반으로 1974년 4월 21일 보령시에 최초로 국제조직을 애향(愛鄕)을 철학으로 대천청년회의소(대천JCI) 창립 초대 회장과 2대회장을 역임하게 되고 이시우 전시장(前市長)이 사무국장으로 인연이 되어 반공탑 설치 및 저소득 원호대상자 영농자금 지원등 보령사랑(愛鄕)의 시원을 만들며 대천역광장에 거금을 들여 “대형전자시계탑”을 제막하고 제3대 이상우 회장 재임시 보령군 새마을 운동 및 광산촌 무의촌 진료로 광산촌 복지를 담당 했고 제4대 전용설 회장 재임시 창립 3주년 기념으로 보령의 최고 권위의 “제1회 만세보령대상”을 제정하고 대천극장에서 시상을 함으로 지금까지 만세보령대상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보령군의 어려운 농촌현실에 1979년 보령군농촌지도소에서 보령군새마을청소년회(보령군 4H연합회)와 자매결연을 맺음으로 후에 농어민후계자 양성과 지금까지 보령시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어 2008년 시작된 “제16기 만세보령농업대학”, “제15회 만세보령농업활대회”등 역사적인 만세보령의 명맥과 만세보령특미, 만세보령의 양송이등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희철 농촌지도소장과 이완상 군수 와 신홍식 회장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만세보령의 보령사랑 운동인 애향(愛鄕)으로 승화(昇華) 시킨다.

근대의 보령의 역사속에는 1986년 1월1일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어 대천시가 탄생되고 1986년 5월 지역의 균형 개발과 시민의 복지증진에 힘쓰며 선진 시민 의식 함양, 애향심 고취, 지역 현안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각종 토론회 및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는 사업으로 회원 55명과 함께 창립 초대 회장으로 신홍식(申弘湜) 회장이 맞게되어 보령시에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지방사로 남게된다.

또한 신(申)회장은 크고작은 보령시의 대소사와 1987년 대천문화원에서 최초로 발간되는 애향지(愛鄕誌) 창간과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김학현(金鶴顯) 군수에 의해 탄생된 “제1회 만세보령문화제”가 남포면 창동리 농장저수지를 메우고 만든 보령종합운동장에서 성대히 팡파르를 울린다.

“만세보령문화제(萬世保寧文化祭)”는 고(故)김학현 전(前)보령시장 께서 1988년 고향에 처음으로 보령군수로 부임하여 군민의 날(10월1일) 제정과 시민 화합, 애향 정신의 결속을 다지며

지역향토 문화의 계승은 물론 삶의 질 향상을 위함을 목적으로 시민과 함께 출범을 하게 된다.

 한편, 대천시(大川市)의 역사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부에 있었던 시(市). 1986년 보령군 대천읍에서 시로 승격된 이후 한국의 중서부 해안의 거점도시로서뿐만 아니라 서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천해수욕장이 있어 해안관광 휴양지로 발전해왔던 지역이다. 1995년 보령군과 통합되어 보령시(保寧市)가 되었다. 지금의 보령시 대천·죽정(竹亭)·동대(東垈)·화산·궁촌(宮村)·명천·내항(內項)·남곡(藍谷)·요암(蓼庵)·신흑(新黑) 등 10개동에서 5개동으로 이 지역에 해당한다.

보령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신촌현(新村縣 또는 沙村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신읍현(新邑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 보령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018년(현종 9) 홍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 보령현이 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홍주부 보령군, 1896년 충청남도(忠淸南道) 보령군(保寧郡)이 되었다. 이 무렵 명암면이 우라면(于羅面)으로 개칭되고,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우라면과 목충면이 대천면으로 합해졌다.

이때 종래의 보령군과 남포군, 오천군을 병합하여 면적이 확대된 보령군의 군청소재지가 대천면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조용한 어촌이었던 이곳이 군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했다. 더욱이 1931년 천안과 장항을 연결하면서 충청남도 서부를 관통하는 장항선이 개통되어 대천을 통과하게 되자 지역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1962년 대천면이 읍으로, 1986년 시로 승격되어 보령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보령군과 통합되어 보령시(保寧市)라는 도농통합시가 되었다.

이제 우리 보령지방의 질곡의 역사속에 대천청년회의소(JCI)의 탄생과 창립 50주년을 맞으며 역사속애 보령과 관련된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지방사의 역사속에 기념사업등 시민의 관심속에 총설적인 내용만으론 부족하지만 보령시민의 삶의 질 향상과 “건강한 도시 행복한 보령”에 기여할 수 있는 원천적 자원을 함께 고민으로 풀어갈 디딤돌의 기회 가치가 계승되기를 바란다.

“본래의 지방사” 연구란 지표면상의 일정 공간을 토대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왔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유·무형의 자취들, 즉 문화를 종합적으로 분석, 고찰하여 그 공간을 보다 나은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지방적인 특수성을 연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보편적인 역사적 의의를 발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겉보기에 똑같은 사례연구라도 그 목적이 국가사의 일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그 지방 자체의 지방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냐에 따라 각각 “지방화된 전국사”와 “본래의 지방사”로 구분된다. 말하자면 “사례연구로서의 지방사”와 “전체로서의 지방사”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의 지방사”라고 해서 국가사와 전혀 무관한 연구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지방사는 지방의 독자성을 기초로 하되 국가의 전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자기 충족적인 입장에서 독자성을 최대로 살리되, 전체 국가사의 기초로서의 의미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참고 문헌 : 보령군지, 대천시지, 한내돌다리(대천JC20年史), 대천JC창립 제35주년기념지

애향지(愛鄕誌) 외 고려충신 김성우장군 추모 사적문(高麗忠信 金成雨將軍 追慕史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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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사랑 2023-08-29 06:25:52
이런 좋은 기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찌 보령문화원에서는 애향을 부정하나요.
진정성도 없는 향토사 연구의 핑계로
돈만 왕창 해먹고 지역 문화는 개판 만들었다는 여론이
뜨겁습니다.
이영우 뿐입니다.
애향을 부정하는 향토가 왜 필요한가요?♡

이상호 2023-08-28 13:38:39
신홍식 회장님의 숭고한 애향 정신과 보령사랑 정신을
이제는 보령시민이 나서서 기념사업을 제안합니다.
경우회 , 자유총연맹 , 새마을 등등
대천청년회의소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결같은 봉사로 50년을 보령시에 뿌려놓은 씨앗 보령의 역사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문화회원 2023-08-28 12:49:23
만세보령을 듣기만했지 이런 기막힌 역사가 있다는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대천청년회의소 역사를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보령시장신문 고맙습니다 ^^

청년회 2023-08-28 11:38:07
오래된 사진을 보니 신홍식 회장님
그립네요

구자홍 2023-08-28 10:14:13
언론에서 지역의 애뜻하고 영광스런 지난일을 연재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연재해주신 내용대로 선배님들의 선한 영향을 후세에서도 배워서 지켜가야할 보령의 가치인것 같습니다. 보령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져 살아나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