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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독립운동가 후손 들은 지금...
보령의 독립운동가 후손 들은 지금...
  • 유인경
  • 승인 2009.03.08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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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은 현재 보훈처에 33명에서 1명이 추가 되어 34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다.왜곡된 2명은 제외하고....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진실’이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겨우 10% 정도이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 중졸 이하의 학력이 55%다. 이 가운데 유족등록증을 갖고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채 생계대책도 없는 유족이 1114명. 극빈층에 속하는 유족에게만 제공되는 생계지원비 월 25만원이 유일한 국가의 은덕이다. 일신과 가문의 행복을 뒤로 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산을 빼앗겨 집안이 몰락했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오로지 조국 광복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쏟아부어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가난과 멸시뿐이다.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란 자부심이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현실이어서 당연히 학교 교육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독립유공자인 아버지의 이름조차 한글로 쓰지 못하는 무학의 유가족들도 많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병마도 선물처럼 따라 온다. 자신은 유복하게 자랐거나 재력이 있고 고등교육까지 받았어도 독립운동하느라 하얼빈, 상하이 등을 누비다보면 아이들은 양가집 자손임에도 넝마주이, 좌판행상 등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다.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가장 흔한 직업이 ‘경비’다. 고단한 직업을 전전하다 나이들어 겨우 얻은 경비업무 종사자가 가장 많다. 왜 우리 할아버지는 친일해서 돈을 모으거나, 이승만정부에 충성해 자리를 얻지 못할까하고 조상과 조국을 원망하다가 다른 나라로 떠난 유가족들도 많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전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5154명의 4.4%인 225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경제·생활수준이 ‘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자가 59.4%(133명)나 되었다. 반면 ‘중층에 속한다’고 응답한 이는 40.1%(90명), ‘상층에 속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1명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생활·경제수준이 ‘중·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이 99% 이상이다.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에 밝힌 자료를 통해 후손 5154명 가운데 상층 1140명, 중층 2353명, 하층 1605명, 생계곤란층 56명으로 분류했다. 비율상 분포는 상층 22%, 중층 45%, 하층 32%, 생계곤란층 2%이다. 실제 독립유공자들이 느끼는 생활수준은 국가보훈처 판단과 거리가 아주 멀다. 물론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해오고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지원방식에 허점이 많고, 후손의 상당수가 국가의 지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독입유공자의 유족에 대해 최대 손자녀(3대)까지만 보상 및 예우를 한다. 45년 8월15일 이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자녀(2대)까지만 보상을 받는다. 연금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유족 1명으로 한정돼 있다. 선순위 유족(1순위 배우자, 2순위 자녀, 3순위 손자녀)이 사망할 때까지 2남, 3남, 딸 등은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유족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유족들의 경우 실태조사도 돼 있지 않다. 정부가 지원을 검토하려 해도 기초자료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 독립유공자 가족 가운데 가장 명문가이며 사회적으로 대우받은 유족은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들이다. 둘째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 장관을, 그의 장남 진씨는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다. 차남 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현재 국가보훈처장, 3남 휘씨는 광고대행사 대표이며 외동딸 미씨는 빙그레 김호연 회장의 부인이다. 그러나 백범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유가족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36년 뤼순감옥에서 서거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광복후에 오히려 고통을 겪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까지 받아 넝마주이, 부두노동자로 떠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망명길에 올라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한 무국적자 신분이다. 신채호 선생 명의의 땅과 집도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그의 자손들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라고 원망어린 말을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은 천석꾼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고 임시정부 일에만 몰두해 자식교육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의 장남 경식씨는 물론 손자 하정씨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변변한 직업도 못가진 채 65세인 지금 스리랑카 출신 근로자인 양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에게 우리 국가와 국민들이 보여주는 도움은 빈약하다못해 부끄러울 정도이다. 충분한 경제적 보상과 함께 유공자들과 그 유족들을 최대로 예우하는 보훈정책을 시행하는 프랑스는 전국 각지의 거리·광장 등에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붙여 유공자를 기념하는 등 그들의 사회적 예우에 힘쓰며 유족에게는 연금 지급뿐 아니라, 기업체 의무고용 규정을 마련해 취업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보훈부의 직원 숫자가 연방정부의 14개 부서 중 국방부에 이어 2번째로 많고 예산 규모는 586억달러(약 55조원, 2001년 기준)로 전체 예산의 2.7%를 차지한다. 정부 예산의 1.65%인 우리의 국가보훈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들을 더욱 서글프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향한 왜곡된 시선들이다. 해마다 광복절 행사 등에 광복회 회원, 독립유공자 가족들을 초대해 고작 엑스트라 노릇만 시킨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자료 수집에는 관심도 없고 가족들이 준비한 자료는 ‘전문가 부족’ 등을 내세워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한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국가보훈처 직원들조차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며 “각종 문의를 할 때마다 내가 구걸하는 느낌이 든다”고 불쾌해했다. 더더욱 유공자 가족을 분노케하는 것은 “대체 조상 한 명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몇 대가 울궈 먹을 거냐”고 주장하는 이들의 그릇된 시각이다. 게다가 유명한 독립유공자를 이용해 자신의 경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이나 사업기금을 노리는 이들이 기념사업회, 숭모회 등 각종 단체를 만들어 유가족들을 두 번 울린다. 지난 정부에서 국가보훈위원회를 열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환수한 재산을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지원하겠다고 밝혀 올해까지 전반적인 보훈보상체계 개선방안을 마련할 계획이긴 하다. 빈약한 정부예산을 대신해 친일파들에게 환수한 돈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금 지원 등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윤주경씨는 이렇게 말했다. “친일파 재산문제도 그렇고, 좌와 우도 그렇고, 이제 서로가 미워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공과 과도 치우치지 않게 따져야겠지요. 독립유공자 가족들은 국가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거든요. 존경받거나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교육만이라도 국가가 책임져주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조상이 애국해서 후손이 고생한다는 원망은 하지 않게요.” 일본에 충성하고 시대가 바뀌어 친미파로 변신한 이들의 후손에겐 부와 명예가, 우직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후손에게는 가난과 질병만 물려진다면 누가 애국애족을 할까. 숭고하고 고결한 애국정신을 가진 이들의 후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나라, 심지어 그들을 이용하려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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