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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보령5열사 역사왜곡 진실을 찾아서..
[1부]보령5열사 역사왜곡 진실을 찾아서..
  • 양창용 기자
  • 승인 2016.08.07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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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호 역사학자는 40여년 동안 철저하게 보령시민을 속엿다.

 

▲ 지산 김복한

행동하는 선비 지산 김복한
안동인(安東人) 김복한의 자는 원오(元五) 요, 호는 지산(志山)이다. 문충공 상용(文忠公 尙容)의 10대 손으로 철종(哲宗)1년(1860) 7월 24일 홍주읍 조휘곡(朝輝谷, 지금의 소향리 향산동)에서 출생하였다. 6세 되는 정월에 외간상을 당하고, 7세 되는 11월에는 내간상을, 다음 해 에는 조부상을 당하였다.

 

33세에 별시문과 (別試 文科)에 합격하여 교리(校理)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는 사서(司書), 통정(通政), 대사성(大司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왜적이 내정에 손을 뻗치자 갑오(甲午)년 4월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집 으로 돌아왔다.

을미(乙未)년 8월 역신(逆臣)과 왜적이 공모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이설, 안병찬(安柄璨), 이근주(李根周)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승우 (李勝宇)에게 체포되어 홍주옥(洪州獄)에 투옥되었다.

다음해 정월 경성 감옥으로 이송되어 고등재판소에서 10년의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병신(丙申)년 3월에 성균관장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고, 정유년(丁酉年) 3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무술(戊戌)년 국사가 절망상태에 이르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도 (門徒)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을사(乙巳)년에 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역신들을 처단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한 뒤 투옥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그해 12월 30일에 석방 되었다. 병오(丙午)년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킨 데 관련한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공주 경 무청에 다시 경성 경무청에 이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미(丁未)년 10월에 민심을 선동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교자(轎子)가 청양 구수리고개에 이르자 왜경이 대갈일성(大喝一聲)에 정교(停轎)를 명하고 곤봉으로 무수히 난타한 다음 발포하려는 순간 한인 순경 정원조(鄭元朝 法東面人)의 급구(急救)로 명중을 면하였다.

이 때에 모진 고문으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여 식사와 대소변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하였다. 기미(己未)년 전국 유림의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보내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는데 이때에 그가 옥중에서 읊은 옥중시가 있다. 人皆欲死死 我獨無其術 擬刃勿莫持 欲經足豈立 親屬樂不求 溺水尤無設 惟當餓而死 少學淸聖節

신유(辛酉)년에는 문도의 수가 늘어나 인지재(仁智齋)라는 강당을 새로 세우고 후진 양성 에 전념하다가 갑자(甲子)년 3월 29일 65세를 일기로 다난하였던 생애를 마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왜적이 망하거든 나의 영혼 앞에 왜가 망했다는 사실을 전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 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에 있고, 1973년 제자들과 홍성군수 조영호(趙塋鎬)의 성의로 군비를 투입하여 추양사(秋陽祠)라는 사우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自靖)하고자 하였더니, 지난 해(1895) 8월의 대변(大變,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逆臣)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臣民)된 자의 박절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雪恥)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1896. 2. 25. 고등재판소)

추신:
지산 김복한 선생은 홍성군에서 출생하여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홍송에 위치한 사당 추양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보령5열사로 등제된 지산 김복한 선생님이 보령하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40여년의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보령5열사를 주장한 당사자들은 아직까지도 아무런 설명이 없이 각종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여 시민들 눈 살을 찌그러지게 만들고 있어 양심있는 학자의 바른 설명이 요구된다.

보령문화원에서는 왜곡된  보령5열사를 바로 잡아 시민들에게 공포해야 한다.

보령시 봉황산 등산로 충의탑 등록된 지산 김복한 선생은 홍성 사람이 확실합니다.
40여년 동안 보령 5열사로 등제되어 있어도 누구하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양심있는 역사바로세우기 운동본부에서 끝까지 추적하여 잘못된 역사를 보령시민들에게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아직도 보령은 패거리들이 못된 짓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실을 찾고자 노력한 사람들은 단체의 묘략으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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