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2024.07.17. 자(字) ‘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 이런일도한다!’제하의 기사에 소개된 계목완문(啓目完文)이 전국의 향토사학자들의 관심과 성균관, 고문헌연구가,등등 많은 관심속에 경주김씨보령시종친회(회장 김완집)의 노력으로 성균관에서 명경일 박사 「조선시대 계목 연구」를 토대로 해제 되어 번역 출판 계획이라고 밝혔다.
본사에서는‘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의 협조로 독자와 소통하고 국가유산 자료를 공유하기 위해 후속 보도로 계목완문(啓目完文) 번역본 원본(原本)을 소개 한다.
1. 계목완문(啓目完文)의 뜻
계목완문은 계목과 완문의 합성어다. 계목(啓目)은 조선시대 국왕에게 정무(政務)를 아뢸 때 사용하던 문서 형식인 계문(啓文)의 한 종류다. 계문(啓文)에는 국왕에게 대사(大事, 국가의 큰 일)를 알릴 때 쓰는 계본(啓本), 국왕에게 소사(小事, 중요도가 떨어지는 작은 일)를 알릴 때 쓰는 계목(啓目), 외직으로 나온 신하들이 아뢰는 장계(狀啓), 암행어사 등이 사용하는 서계(書啓) 등이 있다. 따라서 계목(啓目)은 “국왕에게 아뢰는 국가의 작은 일과 관련된 문건”이라는 의미다.
한편 완문(完文)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완성된 문서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관청에서 향교나 서원, 결사(結社)와 같은 단체, 마을 단위 혹은 개인 등에게 발급하던 문서를 말한다. 오늘날 관청에서 발부하는 증명서 혹은 공문서와 같은 성격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완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향교의 교생, 서원의 원생, 사대부가의 산지기, 서원의 속촌(屬村) 등에 대하여 신역(身役)·연호잡역(烟戶雜役)·환자(還上) 등의 면제를 인정 또는 확인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계목완문은 개인 또는 단체가 올린 청원(오늘날의 진정)에 대해 왕의 결재를 받아 당사자에게 발급한 문서가 된다.
2. 계목완문(啓目完文)의 체계와 내용
1) 계목(啓目)과 계하(啓下)
계목의 기본 형식은, 작성 관청, 첫머리(啓目으로 시작), 아뢸 내용, 종결어(何如, 어떻습니까?), 작성 일자, 담당자 서명, 관인(官印) 등이다.
본 문서 역시 위와 같은 계목의 기본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작성 관청은 형조(刑曹)이고 아뢸 내용은 금년(1893) 8월 28일 왕의 행차시에 있었던 격쟁(擊錚)의 내용이며, “특별히 항교의 임원으로 허락함이 어떻습니까(何如)?”로 종결하고 있다. 작성일은 1893년 9월 8일, 담당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송종억(宋鐘億)이다.
즉 격쟁(擊錚)을 담당한 형조에서 내용을 살펴보고 처리할 방안을 마련하여 계목을 올리면, 승정원에서 이를 받아 임금에게 전달하고 임금은 해당 내용을 살펴서 가부(可否)와 기타 판단을 내리게 된다.
본 문건에서는, 형조의 계목에 따라 임금은 시행할 것을 허락한다. 임금의 윤허(결재)가 이뤄졌으므로 형조에서는 해당 도(道)에 관문(關文, 공문)을 내려, 시행하도록 독려하고 일의 경과와 결과를 회신하도록 명령한다. 여기까지가 계목과 계목에 대한 계하(啓下, 임금의 재가를 받는 일)의 과정이다. 본 문건에서도 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 원정(原情)
본 문건에서 계목(啓目)과 계하(啓下), 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격쟁(擊錚)을 하게 된 내용, 즉 원정(原情)이다. 원정은 “사정을 하소연하다”는 의미로 오늘날의 진정(陳情)과 유사하다. 이 원정은 본 문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내용이 길다. 내용을 간추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격쟁을 하는 저희들은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들로 조선왕조에 들어서도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2) 태종 때, 김백련(金百鍊)이 상소를 올려 경순왕의 치적을 높이 평가한 일이 있었다. 성종 때, 경순왕의 후손들을 도우라는 말씀이 있으셨고 효종 때에는 경순왕의 후손들을 등용하여 쓰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3) 이런 근거로 남포(藍浦)에 세거하던 후손들은 백여 년 간 향교와 문묘, 향청 등에서 임원직을 맡아 일해왔으나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분란을 일으켜 임원의 길을 막고 있으니 저 안(安)씨, 황(黃)씨, 윤(尹)씨, 최(崔)씨 등으로 자신들이 임원의 직을 맡고 있다.
(4) 이 사안과 관련하여 지난 경신년(1860, 철종11)에 이미 한 차례 격쟁을 한 적이 있었고 철종대왕은 김씨들의 향역을 침범하지 말 것과 법률에 따라 조치하라는 명이 있었다.
(5) 또한 무인년(1878, 고종15)과 기묘년(1879, 고종16)에 현재 교임(校任)을 맡고 있는 자들을 내치고 구유(舊儒)들이 논의한 것들을 청금록(靑衿錄, 유생들의 명부) 말미에 기록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에 대해 고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6) 그럼에도 현재 그들이 교임직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지극히 이치가 없는 것이며 마을에서 분란이 끝이지 않고 있다. 그러니 천지 부모와 같은 임금께서는 김씨 성(姓) 중에서 재주와 덕망 등이 탁월한 사람으로 하여금 교임을 맡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3) 완문(完文)
계목(啓目)과 원정(原情)에 이어지는 부분은 완문(完文)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완문은 관(官)이 민간에게 발행하는 공문서다. 완문의 형식은 보통“이 완문을 누구에게 발급한다”로 시작하며 “영구히 준수하여 따름이 마땅하다”로 끝맺는다. 본 문건 역시 이와 같은 완문의 형식을 준수하고 있다.
3. 계목완문(啓目完文)의 특징과 사료적 가치
본 문건과 동일한 제목과 내용을 담은 계목완문이 존재한다. 소장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며 청구기호는 <K2-3624>이다. 본 문건과 장서각 소장본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일부 글자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는 필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보이며 두 판본 간의 선후 관계는 단언할 수 없다. 두 판본 간의 차이는 추후 보강된 연구를 통해 진행해도 좋겠지만, 내용상 차이가 없으므로 자구(字句)의 정오(正誤) 정도만 짚을 수밖에 없다.
본 문건의 특징으로는 계목(啓目), 원정(原情), 완문(完文)이라는 체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좀더 많은 자료들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격쟁(擊錚)을 통해 계목이 만들어지고 그에 대한 처결(處決)과 원정(原情)을 함께 실고 완문(完文)까지 겸비한 문건이 흔치 않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문건은 조선후기 격쟁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원정(原情)의 내용을 통해서는, 우리가 흔히 향전(鄕戰)이라는 부르는 신유(新儒)와 구유(舊儒) 간의 갈등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영정조 시기에 시작된 마을이나 고을 단위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양반들의 투쟁이 고종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진 구유(舊儒)와 이에 반기를 든 신유(新儒). 본 문건에서 투쟁의 승자는 구유(舊儒)들이었다.
<참고 문헌>
* 명경일, 「조선시대 계목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석사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