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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온, 홍주의병 독립운동사의 큰 도화선의 산실 웅천 집성당(集成堂) 방영
KBS 다큐온, 홍주의병 독립운동사의 큰 도화선의 산실 웅천 집성당(集成堂) 방영
  • 임인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23.03.05 20:2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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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집 도유사, 김광호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원 출연 옛모습 재연

 

‘잊혀졌던 ‘홍주의병’, 그들은 왜 싸웠나…KBS1 ‘다큐 온’ 프로에 김태흠 지사의 충남 의병기념관 건립에 따른 각계의 관심과 역사적 배경이 새롭게 조명이 되고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와 을사늑약에 반발해 일어났던 ‘홍주의병’만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의병운동도 드물다. KBS 1TV <다큐 온>에서는 1896년과 1906년 홍주읍성에서 두 차례 일어난 ‘홍주의병’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조명했다. 홍주는 충남 홍성의 옛 지명이다.

홍주의 유학자들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김복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3일 만에 의병 지도부가 체포되고 흩어졌다. 2차 의병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해 일어났다. 홍주 의병들은 열흘간 홍주성을 사수했으나 우세한 전력을 앞세운 일본군 정규군에 패배했고, 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의병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보령출신 류준근 선생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를 갔다. 대마도로 끌려간 이들은 그곳에서 만난 전라도 의병장 최익현과 함께 이후 치열한 항일 투쟁을 벌였고, 이들의 활동은 1910년대 광복회 활동과 3·1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홍주의병이 우리 독립운동에 큰 도화선이 됐는데 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잊혀진 역사, 홍주의병’ 편은 지난 24일 오후 10시50분에 방송 되었으며 웅천 집성당이 최초로 소개 되었다.

홍주성역사박물관이 최근 입수한 <마도일기>, 저자는 1906년 홍주의병으로 참여했다가 대마도로 끌려가 유폐되었던 류준근이었다. 홍주는 홍성의 옛 이름이었다. 류준근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홍주에서 봉기한 의병의 지도부였다. 열흘 간의 혈투 끝에 홍주성을 다시 함락한 일본은 류준근 등 9명의 의병을 대마도 유배형에 처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유배였다. 이들이 유폐는 당시 조선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내린 고도의 정책적 결정이었다.

한편, 웅천 집성당(集成堂)은 보령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으로 유일한 보령의 강학기관으로 존재했던 곳으로 현재 보령시 향토문화유적 2호로 1991년 등록 되었으며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산 14번지에 자리 하고 있다.

연혁으로는 1898년3월 화서학파 삼희당 윤석봉 선생의 주도하에 옛 남포현을 중심으로 보령, 서천, 홍성, 청양, 부여등 인근 지역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발하여 350여명이 참가(동참록(同參錄 참조)하여 주자의 영정과 우암송시열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기리고자 제례를 갖추기 위한 사당으로 시작 되었다.

1905년8월 남포군수 이석재(李錫宰)는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개축도 하였고, 당직1명 과 유사1명, 공납[호포와 환곡]과 잡세[도정과 무명잡세]등을 일체면탈(세금면제) 한다는 완문책자(完文冊子:이조때 관아에서 부동산 따위의 처분에 관해 발급하던 증명서) 를 발급하였다.

또한 후학들을 강학(講學)하기위한 수칸의 한화당(寒華堂)을 건립하였는데, 특히 이곳에서는 항일위정척사 사상을 강론 하였다.

1906년 민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에도 이곳출신 문도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1910년 11월 집성당 창건자 윤석봉은 홍주의거에 참여했다 피체되어 투옥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케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때는 민적부(호적부)에도 신고를 기피하여 무적자(無籍者)로 일생을 마쳤다,

1919년에는 집성당 배출인물중 옥재 백관형이 파리장서운동에 김지정과 참여 서명하였다. 특히 백관형은 1916년 만동묘에서 항일연설로 3개월간 옥고도 치렀고, 3.1운동에도 참여는 물론, 조선독립 애원서 작성서명 등등으로 피체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수형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아울러 1926(병인)년 8월에는 돈암이응복이 집성당 유지보수를 위한 속수계를 결성하여 석채례 제수나 기타 집성당 유지보수에 힘썼으며 1929(기사)년 2월 이교헌의 2차중수기가 있고 1957(창건후재정유)년 9월 임성순의 3차중수기가 있으며1991(신미)년12월10일 보령시향토유적 제2호(313-83-0612)로 지정됐다.

이후 집성당은 부동산등기등록번호=>3438-00612를 취득후 1993(공부자탄강2544계유)년 오재섭의 중수(4차)기에 의하면 김학현군수가 주축이 되어, 중수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한다.

그리하여 집성당은 단순한 주자, 송자를 모시고 제사만을 지내는 사우(祠宇)가 아니고, 항일의 병의 사상을 가진 보령 서천 홍성 청양 등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 활동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역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역활을 한 곳으로 평가 할만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윤석봉, 백관형, 유준근, 김복한, 유호근, 조구원, 신응선등 항일 유림들이 서로 교류하며 항일 의지를 심화(深化)하였던 곳으로서, 현재는 매년 1회 석채례(釋菜禮)을 올리며 옛 선열들의 숭고한 덕을 기리는 곳으로서, 오늘날 후손들이 선조들의 애국심을 선양(宣揚)하는 교육 장소로도 제2의 충남 의병기념역사를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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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2023-03-05 22:10:07
홍성사람 김복한 선생을 보령사람으로 둔갑시킨
보령문화원 황씨들
염치도 모르는 참 나쁜 사람들
사람도 홍성에서 꿔다 쓰나요??

보령5적 2023-03-05 22:07:00
자기 집안을 내세우기 위해 보령5열사 조작 사건이
역사왜곡으로 보령시민을 개망신 당하게 사기친
인간들 반듯이 역사앞에 처단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보령5적으로 기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