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모 교수의 논문 『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菴) 김화식(金華埴) 재조명』 학계의 화제
김영모 교수의 논문 『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菴) 김화식(金華埴) 재조명』 학계의 화제
  • 양창용
  • 승인 2021.03.15 09:45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모 교수
김영모 교수

보령시 청소면의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을 재조명한 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김화식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서 그가 충북제천 호좌의진 의병으로 활동한 유인석 핵심참모였다는 사실과 그의 보령 입향 연유 및 윤석봉과 연관된 단편적인 항일독립운동 사실만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의 재지에서의 활동이나 어떻게 보령출신의 김화식이 화서학파의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의 학문의 연원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독립유공자공훈록’이나 보훈처의 홈페이지에도 이름(김화식), 본적(충청남도보령), 주소(충남보령)만 기록되어있을 뿐 그의 이명(異名), 생년월일, 사망일 등은 기록에서 빠져있다. 또한 의암학계에서 발행한 『국역소의신편』(2006)에는 김화식이 경북 봉화 출신으로 1919년 유림단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현실이다.

충남 보령의 인물로만 기록된 ‘독립유공자공훈록’, 보훈처의 김화식 관련 기록 바로 잡아야

김영모 교수는 『충청문화연구』 25집(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21.2.)에 『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菴) 김화식(金華埴(김화식)) 재조명』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김화식 선계의 보령현 입향과 청소(靑所)로의 이거, 그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및 그의 이명 김우동(金友東) 등에 관한 모든 의혹을 풀어냈다.

무엇보다도 김영모 교수는 김화식 가계의 고찰을 통하여 경기도 파주 거주 김화식 선계의 보령현 입향과 청소 이거가 처변(妻邊)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 김화식의 4대 종조 김낙원이 청라동의 재지사족인 한양조씨와 결혼하여 보령현에 입향한 이래 김화식의 증조 김재인이 한양조씨와 아들 김진국이 능성구씨와 각각 결혼함으로써 처변으로 보령현에 입향하였고, 이후 김화식의 부친 김한표 대에서 숙부 김한기와 조카 김창식이 수안이씨와 각각 결혼함으로써 청라동에서 청소로 처변으로 이거하였다.

김화식 선계의 보령현 입향과 청소로의 이거는 처변(妻邊)으로 이루어져

유인석의 제자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족숙 김한순이 화서 이항로를 잇는 화서학파였기에 가능

김영모 교수는 김화식이 6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 김진국 밑에서 가학으로 공부하다가 족숙 김한순 찾아 배웠고 화서학파의 유중교와 유인석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유인석의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된 그의 학문의 연원을 밝혀냈다. 김화식은 이런 학연으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인석이 주도하는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여 그의 참모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화서학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족숙 김한순이 유중교의 문인이었고, 김한순의 부친 김우현이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김영모 교수는 김화식의 문집 『단몽협흡』(旃蒙協洽)의 분석을 통하여 그가 스승 유인석과 3차례나 중국을 다녀오고 유인석 의병진의 진중의 일기를 정리하여 발간한 『소의신편』을 중국에서 간행한 것이 그의 항일독립운동의 백미라고 평하였다. 특히 김영모 교수는 김화식이 유중교의 문하생으로 남포현의 윤석봉과 연락하며 조선말기 남포현과 보령현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그가 교유한 재지의 인물들의 분석을 통하여 밝혀냈다. 화서학맥의 김화식이 남당학맥의 보령현 재지사족인 유호근 등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보령현 재지서족이 통혼권으로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였고 항일독립이란 시대적 상황이 학맥의 차이를 극복한 것이었다.

화서학맥으로 맺어진 남포현의 윤석봉과 교유하며 보령지방 독립운동 전개의 연결고리 역할

김우동(金友東)은 청소면 진죽리 677번지에 거주했던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의 이명(異名)

마지막으로 김영모 교수는 김화식의 실명(김화식)과 등본의 기록(김우동)이 서로 달랐던 원인이 그의 항일독립운동에 있었음을 족보와 등본의 비교를 통하여 밝혀냈다. 1914년 일본에 의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김화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선전관을 지낸 부친 김진국은 관직명인 ‘김선전’으로, 본인은 ‘김우동’으로 세 아들 또한 가명이나 족보의 ‘자(字)로 등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었던 등본의 ‘김우동(金友東)’은 ‘청소면 진죽리 677번지’에 거주한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의 이명(異名)이었음이 이번 김영모 교수의 연구로 밝혀졌다.

김영모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국내의 독립운동사 연구나 의암학계 등에서도 풀지 못한 숙원을 해결하는데 일조해 기쁘다”면서 “본 연구가 그동안 역사에 묻혔던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 선생을 바르게 평가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충청문화연구』는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가 충청의 역사와 사회문화 전반에 관한 학술연구논문을 학계전문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매년 2월과 8월에 발간하는 전문학술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문화원장 2021-03-16 09:46:08
보령문화원장 으로 추대 하고 싶습니다.

굿 2021-03-15 21:01:47
좋은 기사 잘 보았습니다.
썩어빠진 보령문화가 챙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