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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대한민국의 보물 창고로 만들어 나갈 터 !
보령시, 대한민국의 보물 창고로 만들어 나갈 터 !
  • 양창용
  • 승인 2020.07.11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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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식씨의 “보령시장신문” 기고로 “토정 생활관” 탄생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

흔히 옛 속담에 “상가에서 밤새 울고 새벽에 누가 죽었냐” 하는 말이 있듯이 보령에 제일 큰 산업체인 고정리 보령화력에 30년을 오고가며 토정 이지함 선생 묘소를 보고도 누구하나 관심이 없었는데 중부발전(주) 본사 사옥앞에 토정 생활관 “토정마루”가 개관을 앞두고 보령시민의 새로운 이목이 집중되고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우리나라 지폐 천원짜리의 퇴계 이황 선생이나, 오천원짜리의 율곡 이이 선생은 알아도 동시대의 토정 이지함선생은 보령에서 나고 자라며 묻힌곳이 보령인데도 모두의 무관심속에 안타까운 마음에 충남학 강사이며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인 임인식씨가 보령시장신문 2014년 1월 30일자에 대천 지명 100주년을 맞아 [특별기고] “토정비결의 만세보령은 천운지기(天運地氣)시대 도래!” 제하의 글을 보고 서울의 출향인사가 감동이 되어 이제야 보령시 대천동 중부발전(주) 본사 사옥앞에 4층 건물을 지어 1층에 개관을 이르게 된 것이다.

오천이 고향인 이행수씨는 재경 보령향우회장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평소 토정선생을 흠모하고 후손으로 자료를 모으던중 우연히 “보령시장신문”을 보고 보령에도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좋아 언젠가는 수구지심(首丘之心)이란 말처럼 고향에 투자를 하여 토정 이지함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보령시장신문”의 기고가 동기가 되어 시작하게 되었으며 임인식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자문하며 필연인 것처럼 보령화력과 인연이 깊다며 올바른 토정 알리기 사업에 보탬이 되고 그 가치를 보령의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土亭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지금의 토정마을 부근에서 부친인 현령 이치(李穉)와 모친인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4남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6대 손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숙부이다. 아버지 이치(李穉, 1477∼1530)는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종조부(從祖父) 이파가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석방되었고, 150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판관을 지낸 김맹권(金孟權)의 딸이다. 김맹권은 김성우 장군 후예로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아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았다.1455년 수양대군이 집권하고 단종이 죽게 되자 보령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 現 마포 용강동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淸貧)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는 호가 붙었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 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형 지번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또한 토정 이지함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사결(士潔) 정렴(鄭렴, 1506∼1549)과 함께 대표적인 기인(奇人) 방외지사(方外之士)였다. 그는 경세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자였고, 사회복지의 선구자였다.

토정 이지함이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

莅抱川時上疏·이포천시상소)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國富論)’이라 할 만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즉 ‘국부론’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설립한 빈민구호시설 ‘걸인청(乞人廳)’도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이다.

그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자 선비였던 토정 이지함이 조선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던 말업(末業)과 바다에서 배 타기를 즐겼다는 것은 그를 시대의 이단아로 평가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장사꾼 이지함’, ‘경세가이며 경제학자인 이지함’의 탄생은 알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시련 때문이기도 했고,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인 토정 이지함이 1574년 6품직을 제수받고 포천 현감으로 부임할 때 올린 상소문은 조선 최초의 국부론이자 “생산적 사회복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부론’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토정 이지함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시간을 준비했다.

모진 체험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에 훗날 그가 “서산과 태안의 염전을 잘 경영하면 능히 국가 재정 비용을 댈 수 있다”라며 재정 빈곤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이지함 졸기의 기록처럼 자신은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다.

이지함은 ‘자립’만이 해법이라며, 그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방안인 3대 창고 개발론을 제안했다.

3대 창고의 첫째는 ‘도덕창고(道德之府庫)’, 둘째는 ‘인재창고(人材之府庫)’, 셋째는 재화의 창고를 말하는 ‘백용창고(百用之府庫)’다.

도덕창고론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가 사치와 사욕을 절제하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누자는 정신개혁론이다.

인재창고론은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해 난국을 해결하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주장이다.

나라가 서 있는 한 인재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면서 재능에 따른 인재 배치를 강조했다.

백용창고론은 육지와 바다의 다양한 자원을 아끼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발하자는 주장이다.

‘3대 창고 개발론’은 이지함의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 또한 미래에도 어떤 나라나 어떤 리더에게도 유효하고 변하지 않을 민생구제를 위한 커다란 지혜의 창고이다

포천 상소에서는 크게 광산 개발, 어업 및 염업 규제 해제로 나타난다. 광산 개발에 대해 “은(銀)을 주조할 수도 있고, 옥(玉)을 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산업은 모두 사리사욕을 꾀해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소인배들이나 좋아하는 것이고, 군자는 하찮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은 성인의 권도(權道)”라, 해야 할 산업이라고 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사상적 근본인 선비들의 정신중심주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본주의와는 그 발상이 다른 혁신적 사고였다.

토정 이지함은 백성을 위해 조정에서 금지한 광업과 어업, 염업의 허용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지함이 단순히 원론적 의미의 광산개발만 건의했다면, 그의 주장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지함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다.

임인식 충남학 강사는 “지금은 500년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고있던 시대와는 분명 다르지만 토정선생의 비기를 연구 하고 깊이를 깨닫고, 보령시가 앞을 내다 본다면 보령시는 ”대한민국의 보물창고“가 될 것”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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