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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스님을 아시나요??
지원스님을 아시나요??
  • 임인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18.06.27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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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다니며 보령을 사연 담아 노래로 고향 알림이 스님
지원스님
지원스님

한 많은 사연! 까맣게 시작되는 인생의 기록!!

땅에 발을 딛고 있어도 산소를 강제공급하지 않으면 숨 쉴 수 없고 채 마르지 않은 옻칠 같은 끈적끈적한 어둠이 가로막는 그곳은 인생 막장!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종잇장 같은 생사의 간극 사이로 예측불허의 긴장감이 흐르는 탄광의 하루는 검은색보다 더 짙다. 차마 산목숨을 버리지 못해 하루에도 수 십 번 죽음의 폭약을 터트리는 광부들은 그 중압감을 술과 유흥으로 탈출하려 한다. 그래서 시내는 삼교대에 맞추어 하루 종일 흥청거린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어린 시절 추억은 성주탄광(보령)의 까만 먼지와 함께 켜켜이 쌓여 있다.

초라한 담장과 널빤지로 각각의 경계를 지었을 뿐 동네사람들의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가난이 숙명이 되어버린 탄광촌, 최소한의 희망마저 포기한 채 서로를 위안삼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참담함은 내 인생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있다.

사람은 타고난다고 했던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끼를 모두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노랫가락에 반한 과수댁들은 언제든지 술과 방을 내어주었고, 기다림에 지친 어머니는 들릴락 말락 하는 구음에 맞추어 멋들어진 춤을 추시곤 했다. 어린 나에게 “춤이라는 것은 말이여! 배워서 추는 게 아녀! 먼저 음악이 무엇인지 알아야해! 음악의 길고 짧은 장단은 시간이고, 높고 낮음의 고저는 공간이여! 다시 말하면 텅 빈 허공에 나만이 거닐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 그곳에서 마음 가는대로 노는 것이여! 그러다 보면 음악과 몸이 하나 되지! 그 다음에는 음악도 몸짓도 잊어버리고 놀이터에서 놀 듯 마음가는대로 한바탕 노는 것이여! 이게 내가 선생님께 배웠고 너에게 가르치는 춤이여!…,…․”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길을 가다가도 대폿집 답장너머로 흘러나오는 장구장단에 문득 몸을 실어 나도 모르게 발을 띠는 일이 잦았다. 어머니는 그럴 때 마다 “옳지 그렇게 몸으로 알아 들어야해!” 하시며 당신의 춤을 부탁하더니 늦은 봄 날 사뿐한 춤사위로 가난이 없는 그 곳으로 가셨다.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유명한 선생님의 맥을 잇는 춤꾼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멈추지 않는 아버지의 젓가락장단은 치매로 고생하실 때 까지 이어졌고 가난의 늪은 더욱 깊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그랬듯 춤과 노래는 가족 간의 모든 벽과 장애를 없애주는 신비한 묘약이었다.

아버지의 노랫가락을 맞받아 부르고 음악에 맞추어 몸짓을 짓는 조금은 이상한 아이! 그 아이는 또 다른 신천지를 발견하게 된다. 다름 아닌 축음기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쌍쌍의 남녀가 돌아가는 어머니와 다른 춤! 며칠 동안 담 너머 지켜보았더니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척척 돌아가는 통에 요즘 말하는 신동이 되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현실의 무게를 가늠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무작정 유명하다는 작곡가 선생님을 찾아갔다. 물려받은 끼는 언제나 넘쳤고 기초를 충분히 다져야 한다는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견디기 힘든 욕설과 엄격함으로 쏟아졌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덕분에 대전지역에서는 최고의 가수로 대접받는 여한 없는 삶이 시작되는듯했다.

이제 중앙으로 진출이다. 선생님은 지인들에게 나를 선보였고 경쟁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노래를 배우겠다며 뛰쳐나온 용기는 온 간곳없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왔고 동생 뒷바라지를 핑계 삼아 일체의 활동을 접었다. 선생님은 내가 TV노래자랑에라도 나올까하는 기대로 한동안 전국노래자랑은 물론 각종 음악대회의 정보를 수집했다는 풍문을 접했다.

이 모든 것이 업이 만드는 세력 때문이라는 것을 부처님을 통해 알았다.

끼도 발산하지 않으면 곪아 썩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은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고 나는 또래 여인들이 가지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하는 일 마다 풀리지 않고 신체적 아픔은 일상이 되었지만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쨌든!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아이들은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진작 포기해버린 인생, 그러나 엄마이기 때문에 포기 할 수 없는 고단한 삶은 어린 시절부터 발목을 잡고 있는 막장의 어둠장벽과 같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전깃불 스위치처럼, 노래 부르고 춤추고 장구를 두드릴 때는 날아갈 것 같다가도 춤과 음악이 끝나는 순간부터 아픔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 어릴 때 귀 동냥으로 익혔던 장구를 정식으로 배워보자 싶어 동네 사물동아리에 들어갔다. 선생님과 함께 처음으로 공연가는 날…,…․ 어느 스님이 지역 예능인들과 함께 만든 ‘너나들이’라는 단체의 창단공연이었다.

본 공연에 이어 동네 사람들의 노래자랑 시간, 사회자의 권유에 못이긴 채 무대에 올랐고 그것을 계기로 정회원이 되었다. 마치, 필요 없다고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기계가 다시 돌아가듯 응어리져 있던 나의 끼는 한(恨)으로 풀려 나왔다. 한이 바닥을 드러낼 쯤 지긋지긋 따라다니던 아픔들도 사라지고 허리와 무릎을 짓누르던 살도 빠졌다. 그때서야 끼도 발산하지 못하면 곪아 섞는다는 것을 알았다.

제 2의 인생!

아버지의 바램대로 전국노래자랑 년말결선에서 당당이 입상했고, 설날 차례상에 메달을 올렸다. 남들은 어쩔지 몰라도 KBS공개홀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그 기쁨은 인생의 첫 페이지부터 기록되어있는 까만 아픔에 불을 지폈고 이글거리는 구공탄의 열기로 모두 녹아내렸다.

너나들이 대표이신 스님께서 “보살님! 하루를 살아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하셨고, 틈 날 때 마다 라디오를 틀어 놓듯이 부처님의 말씀을 퍼부으셨다. 처음에는 듣기 싫어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퍼즐조각처럼 하나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그러던 중에 불교종단에서 운영하는 대학에 다녀보라고 권하셨고 우여곡절 끝에 졸업이 출가로 이어지면서 승려의 기초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늦깎이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하는 물음에 “딴생각 하시지 말고 살아온 인생으로 중생들을 보살피세요. 그게 수행이고 법문입니다.”하시며, 세상이 변해서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변하여야 부처가 되니 타고난 노래와 춤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 지원스님의 법입니다. 그렇게 아세요.

이번에는 까만색보다 더 막막한 밑도 끝도 없고 대책마저도 없는 스님의 말씀에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공부도 부족하고, 당장 때 꺼리도 없는데…,…․ 복색을 갖추었으니 해결책은 기도 밖에 없다. 작심하고 뒤꼍에 텐트를 치고 부처님을 모셨다. 촛불도 타오르기 힘든 추위 속에서 입김이 서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불렀다.

기도는 미처 깨어나지 않은 인연의 씨앗에 싹을 틔운다.

“스님, 제가 사비신문과 방송국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하는 전화를 받았다. 출가 사문이 무슨 도움이 될까? 반신반의하면서 만났고, 사장님은 “스님께서 가지신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었으면 합니다.”하는 제안에 “저도 적극 돕겠습니다.”고 답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런 소식을 인근 홍성 용봉산 대한불교조계종 용봉산 석불사 범상 주지스님의 제보로 보령과도 인연이 되어 보령시장신문에서 새롭게 발굴하여 홍보대사로 함께 하고자 한다.

이웃과 사회가 행복해 지는 일에 작은 보탬이 되는 그것을 수행으로 살다가 때가오면 매미처럼 허물을 벗어 놓고 매일 밤 꿈속에서 춤을 추었던 오색 빛 나라로 날아가련다. 훨~~훨

나는 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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