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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역사왜곡! “정체성 찾기 운동”으로 번져 새로운 화제!!
보령의 역사왜곡! “정체성 찾기 운동”으로 번져 새로운 화제!!
  • 임인식 취재본부장
  • 승인 2018.03.04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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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5열사 왜곡논란 학술단체에서 재조명 움직임 활발

 

누구나 애향심을 바탕으로 보령의 향토사 연구는 당연히 존경받고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보령의 역사왜곡 논란의 당사자들이 공직자(역사 선생님)신분으로서 공적인 학교 업무가 아닌 사적인 공공의 영역에서 지식을 이용한 영리 목적의 연구와 교사로서 양심을 저버린 외부 강의 와 집필 등이 지금까지 보령사회에서 정당한 것처럼 미화되고 포장되어 향토사 연구의 목적이 아닌 문중의 역사를 다루어 편협적인 문제로 만들고 논란의 대상으로 만드는 처사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한 보령시장신문 기사들이 역사왜곡 논란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번져간 상태이다.

이제는 더 이상 관련 문중에 상처를 없애고 보령문화원 당사자와 공직자로서의 처신에 수치를 느끼고 시민을 속이는 자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공신력 있는 학술 단체에서 철저한 검증과 기록물을 검토하여 보령의 역사왜곡 백서를 만들 예정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보령의 선비 추강 백낙관(白樂寬) 선생 약사

1848년(철종 )병조참판 홍수(弘洙)의 아들로 남포 불은면(藍浦 佛恩面, 지금의 보령시 주산면) 에서 태어났다.

1880년(고종17)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881년에도 다시 '척왜'(斥倭)를 주창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결사가 되지 않아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1882년(고종 19) 5월 4일에는 홀로 남산(서울)에 올라가 봉화(烽火) 불을 피우고 다시 상소를 올리며 일제의 야욕과 흑심을 성토하다가 투옥되었다. 그 해 6월 9일 때마침 구식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난군(亂軍)들이 그를 '백충신'이라며 의금부에 돌입하여 옥문을 파쇄하고 구출해내어 방송(放送)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 달 만에 군란이 실패로 끝나자 8월에 다시 체포되어 10월에 제주 목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를 주살해야 한다는 조정의 공론이 일어 1883년(고종 20) 6월 제주 유배에서 나와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의 남간(南間)에 수감되었다가 1883년 끝내 처형되었다.

상소 내용편집 (추강집 등 발췌)

1882년 5월 4일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의 상소 일부

"고례(高禮) 때에는 수 양제(隋煬帝)의 강함과 당 태종(唐太宗)의 성대함으로도 모두 낭패하여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국에 와서도 왜국이 여러 번 침략해왔습니다만 그 때마다 패주하였습니다. 선조(宣祖) 중년에 또 대규모로 침입해 들어올 징조가 있었으므로 이이(李珥)와 조헌(趙憲) 등은 다 같이 예비 대책을 취할 것을 진술하였으나 임진년에 와서 풍신수길이 백만이나 되는 무리로 바다를 뒤엎으면서 몰려와 우리의 궁실을 불살랐고 능침(陵寢)을 욕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가를 모시고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마침 명(明)의 구원을 받았고, 또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와 같은 신하들은 모두 나라의 중흥을 보좌한 인물 중에 가장 현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논개(論介)나 월선(月仙)은 먼 지방의 천기(賤妓)로 오히려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용맹을 자랑하던 적의 목을 베어 그 선봉부대를 좌절시켰습니다. 유정(惟政)과 영규(靈圭)는 산 속에 있는 승려이면서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당백으로 바다를 건너가 왜적을 토벌하였습니다. 생략 …….

사후 서울시 등 역사기록

◾서울600년사 연표에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이 남산에서 거화(擧火)하여 원정(原情)하였는데, 척사척외(斥邪斥外)를 논함"이라 기록되었다.

[역사왜곡 논란 전개과정]

“보령신문 보령의 5열사 - 백낙관(1) 2005년 05월 21일(토)발행 황의천 (대천여고 교사)”

9월 14일에 시신이 주산 동오리의 본가 대문에 도착하였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어린 손자가 운구해와 대문 안에 들여오니 부친 백홍수가 병중에 부축임을 받으며 시체를 어루만지며 목을 놓아 울면서 말하기를 “아비는 너와 헤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네가 죽어 아비가 다시 일어선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38년 부자의 정이 여기서 끝났구나! 오호 슬프다 낙관아! 아비의 뜻을 이어받아 상소하고 아비가 죽어야 할 것을 네가 대신 죽었으니 충효가 갖추어진 것이니라. 네 이름이 세상에 떨치고 절의가 해와 달을 꿰뚫었느니라. 너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이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다시 하겠느냐. 이 무궁한 아픔을 말로서 다하지 못함은 너도 알리라. 오호 슬프다.!”하면서 통곡하였다.

11월3일 동막동 선산에 안장ㆍ하관 할 때 관 위에서 무지개가 홀연히 나타났다가 없어지니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상한 일이었다고 전해온다.

결론

역사를 지엽적인 문중사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비문 등을 작성하여 그동안 많은 오류와 역사왜곡에 중심에선 인물들이 그들이다.

지난 제15회 의암학회 학술대회에서 백낙관 선생의 평가는 홍제학의 상소와 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1인시위자 로 충남 보령의 선비정신을 가장 거룩하게 표현하였다. 재평가와 올바른 기록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이제 관련기관인 보령시와 홍성보훈지청에서 “보령항일애국지사 추모비”부터 올바르게 정정 한다하니 다행이고 학술단체에서 학술대회를 통해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에 새로운 교육장”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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