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9:56 (금)
만세보령 (萬世保寧) 의 뜻
만세보령 (萬世保寧) 의 뜻
  • 양창용
  • 승인 2018.01.02 09: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 (보령역사문화원) 임 인 식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 (보령역사문화원)  임 인 식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장 (보령역사문화원) 임 인 식

 

만세보령의 뜻 : 보령지역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오서산과 성주산의 수려함 사이로 넓은 평야와 탁 트인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사람과 산, 들, 바다가 조화롭고 물산이 풍부한 명승지로 자손만대 영영세세토록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땅(萬代榮華之地)의 고장이라 하여 만세보령(萬世保寧)이라 일컬어 오고 있다.

<만세보령의 정의>

만세보령(萬世保寧)은 ‘영원토록 평안함이 지속된다(오래도록 살기 좋은 고장)’

머리말 (만세보령의 뜻을 연구한 이유)

▣ 지방화 시대의 한 지역의 이상(理想)과 역사, 지역성을 상징하는 마크와 고유 상표 용어가 없는 자치단체는 없다.

그러나 그 지역의 주민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상징물(象徵物)들의 의미를 담은 문화 상징 내용은 연구 부족으로 아직 없는 시, 군이 많다. 우리 보령시도 만세보령문화제 등 용어는 쓰지만 그 중의 하나였다.

사실 보령시 마크는 인위적으로 정한 상징물이기 때문에 바뀌거나 세월이 지나면 변경될 수 있다. 그러나 만세보령처럼 한 지자체의 지역민이 지니고 있는 마음속의 상징체계는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다. 수백 년 수천 년 살아오는 동안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 내려온 문화의 앙금이기 때문이다.

한 지역의 고유한 전통 문화 속에는 그 지역민이 오랫동안 공유해 온 ‘상징의 숲’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거기에는 자연의 지리적 특징과 사람이 만든 도구, 행동의 규범이 스며있고 합리적, 과학적 접근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의미가 심연에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휴먼 시대의 보령의 진정한 역사는 어느 전설의 이야기나 전쟁이나 정치적 큰 나라의 사건보다도 보령시만이 가지고 있는 선조들의 생활 속에 면면히 흘러내려오는 상징의 목소리 속에 전해 왔다 할 것이다.

보령지역민의 마음과 영혼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중점을 두고 연구 자료를 공개한다.

만세보령의 용어는 보령의 상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 상징으로 내용을 보충하고 확장하면서 말 그대로 자손만대 영화롭고 번영의 땅으로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보존되길 기대한다.

보령의 연혁

◉ 인류의 역사를 증명하는 보령시내의 무수히 산재 되어 있는 고인돌에서 보듯 아주 오랜 역사와 흥망성쇠 속에 다양한 지명이 등재 기록 되어 있으며 보령시지에 기록된 보령은 삼한시대에는 마한 만로국이 자리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결기군 신촌현이라 불리고 신라시대에는 웅진도독부에 속한 13현 중 산곤현 이었다가 제30대 문무왕 6년 병인(666년)에 웅주도독부로 개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주도독부 치하에 결성군 신읍현 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성종 14년 하남도 웅주(지금의 공주)보령현과 현종9년 양광도 운주(지금의 홍성)보령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보령현과 남포현으로 지속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보령군, 남포군, 오천군이 통합되어 보령군으로 개편되었다.

삼한시대

◉ 삼한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국가이기 전에 한반도 중남부지방에 형성 되었던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킨다.

▣ 보령지역에 속한 마한은 54개의 소국(小國)으로 이루어 졌는데 보령지역은 만로국이 자리했다 전한다.

삼국시대

◉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 연대(신라 : BC 57, 고구려 : BC 37, 백제 : BC 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 보령이 백제에 기록된 것은 근고초왕때이며 백제의 군현에 속했다. 당시 보령은 신촌현과 사포현등 2개현으로 행정 구역이 계속 되다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사비성이 함락 되자(660년)백제 고토에 웅진 도독부와 7개 주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보령지역은 웅진 도독부 13현 중 하나가 된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

◉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고구려를 복속시켰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시대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 행정조직이 신문왕 7년 (687년)9주로 개편되면서 충청도 일대는 웅천주가 되며 보령은 당시 29개의 영현 중 결성군 영현이던 신읍현과 서림군 영현이던 남포현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

◉ 왕건(王建, 877~943)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로 474년 34명의 임금이 다스렸다.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를 남겼으며,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고려(Corea)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후기에는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다가 1392년에 이성계에 의해 멸망했다.

▣ 고려 성종 14년 을미(995년)에 10도제의 개편에 따라 하남도 웅주(현공주)의 보령현으로 개편되었고, 현종 9년 무오(1018년)에 전국을 5도로 병합 통치할 때 양광도 홍주(현 홍성)의 보령현으로 속하였다.

조선시대

◉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다. 1392년부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다스렸다. 조선은 성리학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사상으로 삼아 유교 문화를 꽃피웠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 조선 태종 13년 계사(1413년)에 보령현이 되고, 17대 효종 3년 임진(1652년)에 보령현이 충청수영과 보령부(保寧府)로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하도록 하였고, 3년 후 (1655년)에 다시 분리하여 보령현으로 복구시키고 장척 금신 등 8개 면을 관할하였다.

고종 8년(1870년)에 보령현과 충청수영을 보령부로 합쳤으나 23년 뒤 다시 분리하였고 갑오개혁 이후 보령군, 남포군으로 개편, 1901년에는 오천군이 신설되었다.

근·현대시대

◉ 국권피탈 후 1914년 일제에 의해 전국적인 부군 통 · 폐합령에 의거 보령군, 남포군, 오천군이 통합을 하고 10개면 111리로 개편되었고 보령리(현 주포면)의 군청이 대천(현 대천1동)으로 옮기게 되며 대천시대가 열리게 된다.

◉ 1986년 대천시와 보령군으로 행정구역 분리.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이 보령시로 통합되고 웅천읍이 승격되고 1개읍 10개면 5개 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만세보령이란 용어의 탄생 과정

만세보령의 지명을 보면 보령(保寧)자체가 한자로 편안함을 연상한다. 보령지역은 시대별로 문화의 수용으로 수많은 역사 인물과 문화유적에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불리었다. 1988년 김학현 보령군수가 부임하면서 ‘만세보령’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어 보령의 대명사로 명명하고 보령시 상징탑과 만세보령문화제와 1990년 보령군지의 발간으로 보령의 정신적 고유의 대명사로 정체성과 공동체 함양과 애향심의 결정체로 사용하게 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만세보령 연관 기록

▣ 오성지간(烏聖之間·오서산과 성주산 일대) - 원효결

문헌에 내포가 처음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 원효 대사의 '원효결(元曉訣)'이다. 원효는 "오성지간(烏聖之間·오서산과 성주산 일대)은 산 모습과 물 기운이 가장 뛰어나 나라 땅의 내장부(內腸部)와 같다 하여 내포(內浦)라 한다."고 기록했다.

▣ 오성지간만대영화지지(烏聖之間萬代榮華之地) - 도선

통일신라시대 당시 문성왕의 원당(願堂)으로서의 성격이 있는 성주사지의 웅장함과 무염(無染 당에서 귀국연도 845년), 대통(大通당에서 귀국연도866년), 현휘(玄暉 당에서 귀국연도 924년)등과 교류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신라말의 국토 재계회적 성격으로 지방을 방문할 때 성주산 시에 모란이 언급되며 8모란 전설도 생겨났다.

▣ 토정 이지함 (土亭 李之菡 ) 유래설

오성지간은 가활만인지지요 (烏聖之間 可活萬人之地)

오지자손은 불리오성지간 하라 (吾之子孫 不利烏聖地間)

▣ 흥선대원군 시절 만대 영화지지(萬代 榮華之地)]

가문 재건에 사활을 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요청에 정만인은 자미원이 있다는 서산일대를 발산섭수(跋山涉水)한 결과 "두 곳의 천하 보물을 발견하여 제시하였다"고 한다. 2대천자지지(二代天者之地)와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중 어느 걸 원하시오? 라고 물으니 ‘2대 천자지지’를 원해 혈처에 있는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연천에 있는 부모를 모셔 결국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배출하였다. 그럼 만대영화지지는 어디일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길조로 여기는 까마귀가 편안히 깃들여 산다는 오서산자락에 있다고 말했다 한다. 오서산(烏棲山.790.7m)은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서해안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천수만일대를 항해하는 배들의 방향을 가늠하는 나침반 혹은 등대 구실을 하여 예로부터 등대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자연 만물을 볼 때 먼저 음양으로 나누고 포물선을 그리며 환포하면 양으로 안면(顔面)이라 말하고 등지고 외면하는 형국이면 배면(背面)이라 말한다.

풍수에서는 안면은 좋은 혈처가 있는데 반해 배면에는 기운이 양취되지 않는다 하여 외면을 한다. 그런 후 정혈처를 찾으려면 대관세찰(大觀細察)을 해야 한다.

정혈처를 찾기 위해 대관세찰로 쭈욱 살펴보니 주산인 오서산에서 지현굴곡으로 산진처인 마을 앞까지 내려 온 후 다시 큰 과협을 한 후 지현굴곡으로 혈처에 이르고 있다.

좌우 용호사는 네겹, 다섯겹의 중중으로 주인에게 읍하는 자세가 유정하니 서로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자세이니 방방(方方)마다 충효할 것이고 누구하나 잘났다고 우쭐대는 모난 형상이 없어 형제간 이웃 간 우애는 물론 손(孫)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며 천군만마를 이끌 수 있는 너른 조당과 조당 끝 지점엔 큰 재물창고가 있다. 가야산 주인 자리인 남연군묘가 2대 천자지지의 권력 지향적이었다면 오서산 주인 자리는 권력보다는 자손대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복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이 망하는데 만대영화지지가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아직도 만대영화지지의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건은 있되 주인이 없으니,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밀로 한다는 천장지비(天藏地秘)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국가의 성장 동력은 사람이다. 보령 청라동에서 대한민국의 명 인물 출현을 그려본다.

▣ 안대진(安大進) 교지설

‘만세보령’이라는 지명은 1586년(선조 19)에 호국공신 안대진(安大進, 1561~1604)에게 내린 교지의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는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지만 본 글씨는 후세에 따로 적힌 것으로 보인다. 1988년 해마다 개최되다가, 2000년부터 격년제로 개최되어 ‘만세보령문화제’로 이름 붙여 2014년 10월 제18회 만세보령문화제를 개최하였다.

▣1971년 보령군지

이돈구 (李敦求) 군수의 보령군지(보령군지) 서(序)에 산자수려 하고 만세의 보령을 (萬歲의保寧) 이란 서문중에 있다.

▣ 대천문화원

애향(愛鄕) 문헌중 윤원석 전 대천문화원장 인사말에서 1987년 만세보령(萬歲保寧) 등장한다. (고래로부터 산자수명타 하여 ... 대천시 .보령군은 萬歲保寧의 연원지라 일컬어 지고 있다.)

[결 어]
문화의 수용창구 역할을 한 보령으로 비젼

▣ 보령지역은 내포지역과 더불어 서해안을 통한 문화의 수용과 교류, 전파의 길목으로 바닷길이 열린 포구를 통하여 고대 마한 및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문화의 탯줄과도 같았던 지역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수히 산재한 고인돌을 비롯하여 오합사, 성주사, 등 경순왕부터 불교 유적과 백이정 (白頤正), 이제현(李齊賢), 임자순(任子順)등 유교의 태두와 갈메못성지, 서짓골 성지, 칼귀츨라프 의 고대도 개신교 성지등 모든 종교 문화의 수용과 고려 말 불사이군 남포현의 남은공 임향(任珦) 선생과 보령현의 도만호 김성우(金成雨)장군을 비롯하여 토정 이지함(李之菡)등 항일 독립운동까지 무수히 많은 선현들이 나고 묻힌 곳이다.

일찍이 청소가 고향인 김학현 군수의 부임과 함께 보령시의 무궁한 번영과 풍부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진취적인 기상을 내포하여 희망의 고장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보령지역의 지리적 환경은 현재 내포시대의 주포, 남포 의 충남의 심장으로 중부발전본사와 충남서북부의 젖줄 보령댐 등 자연환경을 통한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게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을 때에는 보령지방이 바다를 통한 외국 문물수용의 전초 기지로 수용의 창구 역할을 해왔다. 특히 성주사를 중심으로 고려의 개국에 지대한 영향과 유교의 수용 및 기독교의 전래 등은 지금시대 시사 하는 바가 크며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실용적 연구와 미래의 정체성을 만세보령의 의미에 담아 보령시민의 인식 전환과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 원문

조선환여승람, 여지도서, 토정집

- 단행본

보령군지, 보령시지, 성주사지 보고서, 충남학의 이해, 보령학 준비안, 원형과 깨달음, 보령문화, 고려의 꿈, 임진왜란 등 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